To the Moon
46억 년 지구의 역사를 일주일로 줄여보자. 월요일 0시 0분 0초에 빨갛고 동그랗게 달궈진 돌덩어리, 원시 지구가 얼추 완성된다. 화요일 오전 6시 즈음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생물인 단세포생물이 등장하고 오전 9시에 이르자 지표가 식고 최초의 대륙이 등장하며 풍화 작용이 시작된다. 일요일 새벽 1시경 마침내 다세포생물이 등장하고 새벽 4시에 이르러서 생물종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다양해진다. 오후 3시경 공룡이 태어나며, 밤 11시 10분에 유인원이 출현한다. 이 모든 과정을 변함없이 곁에서 지켜본 지구의 동반자가 있다. 누굴까? 바로 하나뿐인 지구의 위성, 달이다.

일주일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가 달에 첫 발을 내디딘 건 일요일 자정 0.006초 전이다. 지구와 거의 모든 세월을 함께 한 달의 입장에서 우리의 방문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긴 세월을 함께 한 만큼 달이 지구에 미쳤을 영향은 감히 인류가 태어나서 지구에 미친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으리라. 그런 달이, 지금 이 순간 갑작스레 사라진다면? 아니, 애초에 없었더라면?
그대가 태어나던 날
달이 지구에 있어 어떤 의미인지 알아보기 전에 그 기원부터 따져보자. 달이 어떻게 생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련의 증거들을 통해 충돌설이 가장 유력한 가설로 지지받고 있다. 지구가 한창 만들어지고 있던 때(월요일 새벽 3~4시 사이), 화성과 크기가 비슷한 미행성체 하나가 지구와 충돌했다. 다행히 지구가 산산조각나지는 않았지만 이때 부서진 두 천체의 잔해들이 뭉쳐서 지구의 중력에 붙들린 것이 오늘날 달의 시초이다.
엉뚱한 천체와 부딪혀서 부서진 부분이 달이 되었기에 처음 만들어진 당시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덕분에 달은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소행성들의 충돌 대다수를 함께 받아주었고, 모여드는 질량이 쌓이면서 동그란 모습을 갖춰나갔다. 이후 달은 46억 년에 가까운 시간을 지구의 곁에서 함께하며 지구의 진화에 깊이 관여해왔다.

그대에게 이끌리는 나
달과 지구 사이에 작용하는 가장 큰 힘은 단연 중력이다. 두 천체는 38만4천km 떨어진 거리에서 질량중심 주변을 공전하고 있다. 다만, 달과 지구의 질량중심이 지구 내부에 있는 터라 겉보기에는 달이 지구 주변을 공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달의 인력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자전축과 조수간만의 차이다.
지구의 자전축은 약 정도 기울어져 있다. 세차운동과 마찬가지로 자전축의 기울기도 주기적으로 변하지만, 그 폭이 작아서 지구의 환경과 생태에 큰 변화를 주지는 못한다. 자전축의 기울기가 항상 에 가까운 값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달이다. 달의 인력이 지구의 자전축을 단단하게 붙잡아주고 있기에 지구의 자전 방향이 일정한 것이다. 자전축의 기울기는 행성의 계절 변화로 직결된다. 라는 완만한 경사각은 햇빛이 지구 곳곳에 고르게 퍼지도록 하여 좁은 기온 범위를 유지해주며, 빙하기나 사막화 같은 극단적인 환경 대신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기후를 만들어낸다.
그대가 없었더라면
만약 원시 지구가 티아와 부딪히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달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46억 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 흔들리는 자전축
달이 없었다면 지구의 자전축은 고정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려서 주기적인 계절은커녕 다사다난한 기후를 만들었을 것이다. 가령, 자전축이 계속 흔들린다면 우리는 1년마다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없다. 또한 사계절이 사라지니 제시간에 꽃이 피지 못하며, 곤충들은 꽃가루를 나르지 못한다. 철새들 역시 따뜻한 기후를 찾아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일이 의미가 없어진다. 이처럼 예측할 수 없는 환경은 생물이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할 테고, 이는 곧 생물의 진화에까지 영향을 끼쳐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많이 다른 세상이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 밀물과 썰물
조수간만의 차는 태양과 달의 인력이 지구에 작용한 결과이다. 하루에 두 번 일어나는 이 현상으로 인해 갯벌이 만들어지고 해안선이 형성된다. 달이 없었다면 밀물과 썰물이 일어나지 않는다. 태양은 조수간만의 차를 조절하는 역할일 뿐 밀물과 썰물을 발생시키는 것은 지구에 가장 가까이 있는 달이기 때문이다. 갯벌이 생성되지 않으면 갯벌에 서식하는 수많은 생태계도 존재하지 않게 되며, 육지에서 흘러나오는 오염을 정화시켜서 바다로 내보내는 일이 힘들어질 것이다. 또한 달의 인력으로 인해 해수는 위도가 낮은 곳에 몰려있는 편인데, 달이 없다면 해수는 위도를 가리지 않고 지구 전체에 고르게 분배된다. 다시 말해, 지금과 비교했을 때 바닷물이 극지방으로 몰려가는 것이다. 그 결과 고위도의 땅은 대부분 물에 잠기고 저위도의 땅이 물 위로 드러날 것이다. 대륙이 몇 개가 되었건 그 형태는 적도를 중심으로 지구를 한 바퀴 휘감는 띠의 모양을 하게 되는 것이다.

- 너무 짧은 하루
조수의 흐름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은 또 있다. 바로 지구의 자전 속도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달의 인력으로 발생한 조수의 흐름은 지구의 표면과 마찰을 일으키며 자전 속도를 늦추고 있는데, 덕분에 지구의 하루는 1년에 0.000015초씩 아주 미세하게 길어지고 있다. 달이 생성된 시기가 약 45억 년 전이므로 태초의 지구의 하루를 계산해보면 고작 5시간 15분으로 매우 짧다. 오래 전 지구의 자전 속도가 지금보다 훨씬 빨랐다는 뜻이다. 만약 달이 없었다면 지구는 현재까지도 짧은 하루를 유지한 채 굉장히 빠르게 돌고 있을 것이다. 빠른 자전은 대기의 흐름도 빠르게 만들어 지구는 항상 광풍이 몰아치는 정신 사나운 기상 조건을 갖추게 된다. 이 경우 빠른 바람에 적응하는 생물만 살아남거나 생물이 이에 적응하는 형태로 진화할 것이다. 아마 새처럼 날개를 가진 생물은 쉬이 찾아보기 힘들어질 테고, 땅에 붙어사는 여러 식생과 동물들은 키가 작고 통통해질 것이다.
- 나를 지켜준 그대
굳이 중력의 효과가 아니더라도 달은 그 자체로서 가지는 크기만으로 지구에 충분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구 생성 초기, 지구는 주변에서 모여드는 소행성들의 충돌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달도 곁에서 함께 소행성들을 맞아주고 있었다. 지구의 하나뿐인 위성이며, 태양계 내에서 모(母)행성 대비 크기 비율이 가장 크다는 특징은 달로 하여금 지구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주도록 했다. 달에는 대기가 없기 때문에 지난 45억 년간 몸으로 받은 운석과 소행성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개중에는 직경이 1,500km 안팎에 달하는 거대한 크레이터들도 있다. 이는 크기가 200~300km에 이르는 거대 운석들과 충돌한 흔적이다. 만약 이만한 크기의 운석들이 지구에 떨어졌다면 지구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쓸어버렸을 것이다. 충돌로 발생한 파편이 다시 지구로 재진입하며 녹아서 지구 반대편까지 전부 불지옥이 되니 말이다. 실제로 백악기 말 공룡을 포함한 여러 생물들의 대멸종 원인이 유카탄 반도에 떨어진 운석 때문인 것으로 설이 굳혀지고 있다.
- 당신이 없는 우주
만에 하나 이 모든 악조건들을 뚫고 인류가 살아남아서 문명을 구축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현대와 비견되는 수준의 문명을 구축하기까지 지금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첫째, 밤하늘을 비추는 달빛 없이 새까만 밤에 살아남기 위해 생존 기술을 익히거나 다른 감각을 발전시키는 쪽으로 진화하느라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둘째, 달의 운행을 보고 1년 12달의 역법을 제작할 수 없기에 별자리나 다른 천체의 운행을 보고 시간의 흐름을 측정해야 할 텐데 이는 굉장히 오랜 경험과 고도의 지식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자연스레 달과 관련된 세계 여러 나라의 전설도 사라지고,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도 없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인류가 살아남은 경우를 상정한 이야기지만 상황이 어느 시나리오로 흘러가든 달이 없는 지구는 인류가 태어나서 자라기에는 그다지 좋지 않은 조건임에 분명하다.

그대가 떠나간다면
어느 날 갑자기 달이 지구 곁에서 사라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실제로 달은 태어난 이래 매년 4cm씩 지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달의 인력에서 비롯된 조수의 흐름은 지구의 자전을 방해하여 오늘날 하루 24시간이라는 결과를 내주었지만, 자전 속도의 감소는 지구 자신의 각운동량에 손실을 야기한다. 지구와 달은 서로의 중력으로 붙들린 하나의 계(system)이기 때문에 한쪽에서 손실이 발생하면 다른 한쪽이 어떤 식으로든 이를 메워야 한다. 잃어버린 지구의 각운동량을 메우기 위해 달은 지구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자신의 각운동량을 증가시켰다. 그 결과 지구의 하루가 길어지는 만큼 달과 지구 사이도 멀어지고 있다. 굳이 달이 뿅! 하고 사라지지 않더라도 세월이 흘러 지구에서 멀어지면 위에서 말한 징후들이 점차 두드러질 것이다.
지구의 자전 속도는 계속 감소하는 중이라 더 이상 대기 상태가 악화될 일은 없다. 다만 바다가 문제다. 달이 멀어질수록 해수를 저위도로 끌어들이는 인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물이 적은 극지방으로 재분배된다. 이 과정에서 해발고도가 낮은 세계 주요 도시들의 해수면이 높아져서 물에 잠기고 대부분의 나라가 홍수 등의 재해를 겪을 위험이 크다. 달이 지구에서 비정상적으로 멀어지거나 사라졌을 때 겪게 될 가장 큰 재앙이다. 결국 달은 예나 지금이나 더 이상 지구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인 셈이다.

From the Earth
흔히들 지구를 ‘생명의 땅’이라 부른다. 드넓은 우주 안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모든 천체들을 통틀어 생명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지닌 유일할지도 모를 행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지구=생명의 땅’이 아니라 ‘지구와 달=생명의 땅’임을 알 수 있다. 별에서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있고, 대기 조성도 온화하고, 액체 상태의 물도 있고, 크기도 적당해서 중력도 딱 알맞은 행성은 잘 찾아보면 드물게 있긴 있다. 그런데 왜 지구에서만 생명이 무사히 자라나 문명까지 일궈냈을까? 달만큼 모행성 대비 크기 비율이 크고, 달처럼 모행성과 처음부터 끝까지 운명을 같이 한 위성은 거의 없다. 자신의 반려를 뒤흔들 수 있을 만큼 크진 않지만 제멋대로 휘청대지 않도록 곁에서 잡아줄 정도의 힘이 있고,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 하여 거칠고 뜨거운 성질을 온화하고 부드럽게 바꿀 수 있는 존재. 바로 달이다. 45억 년 전 부딪친 인연이 지구에게 세상 어디에도 없는 최고의 반려를 찾아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