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달 기나긴 밤을
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비구뷔 펴리라
***
황진이의 시조처럼 잠이 오지 않는 기나긴 밤을 잘라내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주와 밤은 닮은 점이 꽤 많다. 밤은 결국 우주의 한 조각이니, 이 둘이 서로 닮은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불과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천문학자들은 황진이의 바람과 비슷한 우주를 노래하고 있었다. 우주가 원하기를 바랐던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밤하늘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우리은하가 우리 우주의 전부던 1920년대, 천문학자 허블은 팽창하는 우주의 존재를 밝혀냈고, 인류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끌었다. 그는 외부은하들이 우리은하로부터 꾸준히 도망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허블은 더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욱 빠르게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우주의 나이를 최초로 계산하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우주의 나이는 지구보다 어렸고,1) 이러한 모순점을 지적하며 등장한 이론이 바로 항상 똑같은 우주를 끊임없이 이어나가고 싶었던 천문학자들이 주장한 정상상태 우주론이다.
그럼 천문학자들은 어떻게 밤하늘을 이어나가고 있었을까? 정상상태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가 팽창함과 동시에 넓어진 공간을 채우는 물질이 계속해서 탄생하고, 우주는 항상 똑같은 상태를 유지하게 되며 거시적인 규모에서 변화가 없다. 반면 빅뱅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는 계속 팽창하면서, 그 모습이 계속해서 달라지고 도는 점점 작아지게 된다.2) 빅뱅 우주론을 주장한 가모브는 황진이처럼 우주를 이어 나갈 수 없는 셈이다. 어제의 우주와 오늘의 우주가 계속해서 달라지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로맨틱한 정상상태 우주론은 지금은 죽은 이론이 돼버리고 말았다. 정상상태 우주론을 링 밖으로 날려버린 빅뱅 우주론의 카운터펀치는 무엇이었을까? 정상상태 우주론 VS 빅뱅 우주론 논쟁의 현장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하자.
1923 “우리은하는 전체 우주의 티끌일 뿐이다.”
1920년대 이전까지만 하여도 우리은하는 곧 우리우주의 전부다. 그러나 에드윈 허블이 우리은하와 외부 은하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고, 우주에는 수많은 은하들이 있음을 밝혔다.
1929 “우주는 팽창한다. – 에드윈 허블”
허블은 여러 천체를 관측하여 멀리 있는 천체일수록 더 빨리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을 밝혔다.
1948 본격 빅뱅 우주론 vs 정상상태 우주론 라운드 시작되다 !
– 조지 가모브, 랄프 알퍼, 한스 베테는 질량과 에너지가 한 점에 모여 있다 폭발하면서 우주가 탄생하다고주장하다. 우주는 급격히 팽창하며 식어간다. 훗날 이 이론은 ‘빅뱅 이론’이라고 불리게 된다.
– 프레드 호일, 헤르만 본디, 토마스 골드는 빅뱅이론에 대응하는 정상상태 우주론을 주장하다. – 조지 가모브는 빅뱅 우주론의 증거인 우주배경복사를 예측하다.
1950 “정상상태 우주론 지지자 프레드 호일, 빅뱅이론의 이름을 지어주다.”
프레드 호일이 정상상태 우주론과 빅뱅 우주론의 대조되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Big Bang”이란 단어를 합성하여 사용하다. 빅뱅 우주론의 반대파가 빅뱅 이론의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1965 “정상상태 우주론, 빅뱅 우주론에 카운터 펀치를 맞다.”
마틴 리스와 데니스 사이머는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퀘이사가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퀘이사는 수만 개의 별로 이루어진 은하로,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내뿜고 있다. 퀘이사는 우주 초기의 활동성을 나타내는 천체인데,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퀘이사가 더욱 많아진다는 것은 우리가 초기의 우주를 관측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상상태 우주론에 의하면 초기의 우주나 지금의 우주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아무리 멀리 있다 해도3) 우주는 우리가 있는 곳과 똑같은 모습이기 때문에 퀘이사가 멀어질수록 많아진다는 것은 심각한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은 정상상태 우주론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한편 빅뱅 우주론에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 결정타가 이어진다. 1948년 조지 가모브가 예견했던 우주배경복사가 1965년 로버트 윌슨과 마틴 리스에 의해서 발견됨으로써 정상상태 우주론은 막을 내린다.

“I am glad to say that it isn’t necessary any more to pour Hoil4) on the troubled waters of cosmogony5)
(안 그래도 우주 기원을 연구하기가 힘든데 호일이라는 골칫거리가 빠져서 속 시원하다! 정도로 해석하면 적당할 듯하다.)
1966년
수소와 헬륨은 양성자6) 를 적게 가지고 있는 가벼운 원소들이다. 이렇게 가벼운 원소들은 빅뱅이 일어나면서 합성될 수 있는데, 빅뱅이론에 의한 이들의 정확한 양을 제임스 피블스가 계산하고 이는 관측 결과에도 잘 부합됨이 확인되었다.
1967년 “정상상태 우주론은 졌지만, 그래도 프레드 호일은 위대하다”
빅뱅 우주론은 우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수소와 헬륨이 우주 생성 초기에 어떻게 생성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하지만 빅뱅 우주론을 비판하던 사람들은 빅뱅이 탄소, 철, 질소 같은 원소들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설명해주지 못한다며 빅뱅 우주론을 비판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문제는 빅뱅 우주론을 강하게 반대하던 프레드 호일에 의해서 해결되었다. 프레드 호일을 포함한 연구팀은 무거운 원소들은 매우 뜨거운 별의 중심부에서 합성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빅뱅 초기 우주에서는 헬륨까지만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줌으로써 빅뱅 우주론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비록 정상상태 우주론은 빅뱅 우주론에 의해 부정되었지만, 프레드 호일이 위대한 천체물리학자임을 부정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처럼 빅뱅 우주론과 정상상태 우주론은 약 20여 년에 걸친 논쟁 끝에 빅뱅 우주론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한때 진리로 여겨졌던 천동설이 지금은 우스갯소리가 되어버린 것처럼 인류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패러다임의 변화를 맞이할지 모른다. 지금은 빅뱅 우주론이 우주 생성의 표준모델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22 세기의 천문학자들이 어떤 우주론을 연구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열린 마음일 것이다.
끝으로, 이 을 읽고 이 논쟁에 흥미가 생겼다면 BBC 단편 드라마 Hawking을 추천한다. 루게릭병으로 유명한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루게릭병 발병과 그의 박사과정 시절을 다룬 드라마이다. 프레드 호일의 정상상태 우주론 논문의 오류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빅뱅 우주론을 깨닫는 그의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심지어 스티븐 호킹을 연기한 배우는 국 드라마 Sherlock의 주인공 베네딕트 컴버배치이다!)
1) 방법은 완벽하으나 기술력의 문제로 인하여 오류가 생겼다.
2) 물질의 양은 그대로인데 공간은 넓어지기 때문이다.
3) 멀리 관측할수록 오랜 시간에 걸쳐 도달한 빛을 관측하게 되므로, 먼 우주를 관측하면 오래 전 우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4) 실제이름은 Hoil이 아니라 Hoyle이다.
5) 우주의 기원을 연구하는 학문
6) 양의 전하를 가지고 있으며, 원자핵을 이루는 입자이다. 양성자의 개수에 따라 원자번호가 결정되는데 수소는 원자번호 1번, 헬륨은 원자번호 2 번으로 다른 원자들에 비해 매우 가볍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