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오로라 출현
밤에 불빛 같은 적기(赤氣)가 서북쪽, 동북쪽, 서쪽으로 퍼져서 뻗쳤다가 새벽에 이르러 스러졌다.
[증보문헌비고 상위고 8]
영의정 이광좌가 아뢰기를, “며칠 전 새벽에 일어나 동쪽을 보니 불꽃같은 붉은 빛이 있었는데, 그것은 적기(赤氣)였습니다.”
[조선실록 [원전] 42집 578면]
지구 대기권 내에서 발생하는 가장 멋있는 현상을 꼽으라면 오로라를 꼽을 수 있다. 이제는 대부분 사람들이 오로라가 단지 “우주에서 날아온 전하를 띈 입자가 대기권 상층부에 있는 공기와 부딪혀서 생기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과거에 오로라는 충분히 신비로움과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바이킹족에게 오로라는 젊은 여인의 영혼이 내는 빛이었으며 몇몇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에게는 조상의 영혼이 죽은 자의 영혼을 인도하는 빛이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원리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신비로움이 가시겠는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로라의 빛을 두 눈으로 직접 느끼기 위해 북유럽과 캐나다로 여행을 떠난다. 아쉽게도 오로라는 주로 지구 자기장의 극과 가까운 고위도 지역에서 관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북위 37°에 위치하기 때문에 사실상 관측이 불가능한 지역에 속해있다.
하지만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까지 여러 역사서를 찾아보면 적기(赤氣), 붉은 오로라가 비단과 뱀처럼 하늘을 덮었다는 관측 기록이 70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없는 사실을 지어낸 것도 아닐 텐데, 과거의 기록을 남긴 우리 민족은 한반도를 넘어 시베리아에 살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다!
오로라는 지구 자기장의 양 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역(현재는 고위도 지역)에서 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한반도에서 보이는 것이 아주 불가능 한 것은 아니다.
오로라는 태양에서 날아온 입자와 지상으로부터 약 50km~400km에 있는 전리층의 원자/분자가 부딪히면서 내는 빛이다. 고에너지 입자가 대기를 뚫고 들어오는 것은 마치 주먹으로 기왓장을 격파하는 것과 같다. 세게 내리칠수록 여러 개의 기왓장이 깨지는 것처럼 태양 활동이 활발할 때는 날아오는 입자의 에너지가 크기 때문에 대기권 깊숙이 들어온 후 오로라를 만들어낸다. 반면에 비교적 에너지가 작은 입자가 날아왔을 때는 높은 곳에서 오로라가 만들어진다.
입자가 얼마나 높은 고도에서 오로라를 만들어 냈는지는 그 오로라의 색을 결정한다. 초고층 대기는 고도에 따라 구성하는 원자나 분자의 종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고도 약 200km 이상에는 원자 상태의 산소들이 아주 낮은 밀도로 존재한다. 산소 원자가 낮은 밀도에서 에너지를 얻으면 붉은색 빛을 방출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높은 고도에 붉은 오로라를 만들어낸다. 사진을 보면 낮은 고도의 대기에서 산소 원자가 만들어내는 초록색 오로라에 비해 높은 고도에 있는 붉은 오로라가 더 멀리까지 보인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으며 과거 한반도에서 보인 오로라가 붉은색 적기(赤氣)였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오로라가 중위도 지역에서 보일 수 있는 또 다른 조건은 태양활동이 매우 활발할 때 나타난다. 오로라를 일으키는 하전입자들은 지구의 자기장을 따라 대기권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자기력선과 전리층이 만나는 위도 80° 부근에 둥근 띠 모양의 오로라 오발(Auroral Oval)을 만든다. 이 오로라 오발이 지나는 지역 주변에서만 오로라를 관측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태양활동이 매우 활발할 때에는 상층 대기가 태양 에너지를 받아 팽창하기 때문에 오로라 오발의 크기가 커져서 위도 50° 이하까지 내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 오로라 기록이 태양 활동과 연관이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을까? 당시에는 지구 밖에서 태양 활동을 감시하는 인공위성이 없는 것은 물론 태양에서 끊임없이 무언가가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텐데 말이다. 다행이도 우리 조상님들은 뛰어난 천문학자이자 관찰자로 오래전부터 해질 무렵 태양의 흑점을 관측하고 그 수를 기록해왔다. 다행이도 우리는 태양 활동이 활발할수록 흑점의 개수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과거 흑점의 기록으로도 대략적인 태양활동 극대기를 예측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오로라 기록은 오늘날 고위도의 오로라보다도 더 태양 활동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으로 밝혀졌다. 웬만큼 활발한 태양이 아니면 오로라 오발이 한반도에서 오로라를 관측 할 만큼 커질 수 없다는 것이다.
나침반의 바늘은 정말 북쪽을 가리킬까? 사실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 지구 자기장의 양 극이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북극이 지리학적 북극과 멀어지면 나침반은 실제 북극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킬 것이다. 오로라를 만들어내는 하전입자들도 나침반처럼 지구 자기장에 이끌리는 것이기 때문에 오로라 오발은 항상 자기장 극 근처에서 만들어진다. 지금도 1년에 약 20km씩 움직이고 있는 자북극은 오늘날 오로라를 볼 수 없는 지역도 과거에 자북극 근처에 있었다면 충분히 오로라를 관측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한반도에서 오로라를 관측 했다는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사이에 매우 광범위하게 존재하지만 삼국시대에는 비교적 오로라 기록의 빈도가 낮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자북극 위치를 생각해보자. 11세기~15세기 사이 자북극은 동경 90~180° 사이 위도 70~80° 사이에 있었다. 우리나라 서울이 동경 127°, 위도 37.6° 이며, 당시의 고려의 국경선은 이보다 더 고위도에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태양 활동이 활발할 때 오로라를 관측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자북극의 위치는 2013년 8월 5일 현재 서경 107.49°, 위도 80.22°에 있다.)
이제 더 이상 한반도에서는 오로라를 볼 수 없는 걸까? 누군가 어젯밤 서울에서 붉은 오로라를 봤다고 한다면 당신은 분명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 할 것이다. 아무리 태양활동으로 오로라 오발의 크기가 커지고 붉은색 오로라가 멀리까지 보인다고는 해도 과거와 달리 자북극이 한반도에서 가까운 시베리아에서 캐나라 북부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한반도에서 오로라가 보이려면 예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태양활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불과 10년 전에 한반도에서도 진짜 오로라가 관측 되었다! 태양활동이 극대기에 접어드는 시기인 2003년 10월 30일 새벽에 보현산 천문대에서 촬영 된 이 오로라는 과거 기록대로 역시 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물론 한반도같이 중위도에 나타나는 오로라는 고위도 지역의 것에 비해 어둡기 때문에 육안으로 보기 힘들고 고감도의 카메라로 촬영해야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다시 극대기가 찾아온 태양의 히스테리가 심해지는 2013년. 혹시 우리가 모르는 사이 붉은 오로라 赤氣(적기)가 우리 머리 위 120km 상공에 펼쳐지고 있을지도 모른다!